영화 『돈』(1983) 속 도덕성과 구조주의 윤리, 브레송의 시선으로
로버트 브레송의 유작 『돈』은 표면적으로는 사소한 위조지폐 사건에서 비롯된 비극을 다루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구조주의 윤리관에 기반한 인간의 도덕성과 책임 문제를 치밀하게 탐색하는 작품이다. 이 글에서는 브레송의 독특한 연출 방식과 구조주의 윤리관의 실천적 맥락을 통해 『돈』이 우리 사회와 인간 존재에 대해 어떤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지 고찰한다.
1. 브레송의 『돈』과 구조주의적 시선
로버트 브레송의 영화 『돈』(L'Argent, 1983)은 단순한 범죄영화를 넘어선다. 이 작품은 겉보기에는 사소한 위조지폐 거래에서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을 그리지만, 그 안에는 인간 존재의 도덕성과 사회적 기제 사이의 균열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구조주의적 시각이 녹아 있다. 브레송은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실은 일정한 구조 속에서 반복되고 결정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자유 의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돈』은 고전적인 도덕극이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사회 시스템과 관습, 제도적 메커니즘의 무감각함을 고발하는 구조주의적 비판 텍스트로 읽힌다.
구조주의 윤리관은 인간의 행동과 도덕적 판단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구조 내에서 작동하는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라고 본다. 『돈』 속 인물들은 선과 악, 의도와 결과의 경계가 흐려진 채 각각의 구조 안에서 반응할 뿐이다. 위조지폐를 받게 된 청년 이본은 처음에는 죄 없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일련의 상황 속에서 점점 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브레송은 감정적 묘사보다는 비인간적 시선으로 인물을 관찰하고, 인물 간의 관계보다 그들을 얽어매는 사회 구조에 집중한다. 이는 브레송 영화의 미니멀리즘 연출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감정을 과잉 표현하지 않고, 표정 없는 얼굴과 단절된 대사, 기계적인 동작을 반복함으로써 그는 인물들이 ‘자유로운 개인’이라기보다 ‘구조 속의 행위자’로 보이도록 만든다.
특히 영화의 초반에 등장하는 사진관 장면은 구조주의적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돈을 매개로 이어지는 인간 관계는 그 자체로 의미를 잃고, 상징 체계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여기서 돈은 단순한 화폐가 아니라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기호이며, 사회 구조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는 기표의 역할을 한다. 브레송은 이 돈의 흐름을 따라가며 인간의 행동이 어떻게 결정되고, 또 어떤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돈』은 구조가 인간을 지배하는 방식과 그 속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공백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2. 인간의 도덕성은 어디서 오는가?
『돈』은 인간이 스스로를 윤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는 영화다. 브레송은 인물들을 고전적 의미의 ‘선악’ 구도로 배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인물들이 자신이 처한 사회적 위치와 구조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이로써 도덕성은 ‘내면의 양심’에서 비롯되기보다는 ‘구조 속에서 배치된 위치와 역할’에 따라 변화하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제시된다.
영화 속에서 이본은 무고한 피해자에서 살인자로 전락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그의 타락은 단순한 도덕적 실패로 치부되기 어렵다. 그는 사회적으로 무력한 위치에 있고, 그의 선택지는 제한되어 있다. 이런 조건 속에서 도덕적 결정을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구조적 폭력일 수 있다. 브레송은 이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인물의 감정을 최소화하고, 그의 행동만을 건조하게 보여준다. 관객은 이본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이 질문은 곧 인간의 도덕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유도한다.
브레송의 윤리관은 사르트르적 실존주의 윤리와도 대비된다. 실존주의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책임을 강조한다면, 브레송은 선택의 자유조차 구조의 제약 안에 있다고 본다. 『돈』 속 인물들은 선택하지만, 그 선택은 구조에 의해 제한되며, 결과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의 도덕성은 결과에 대한 책임이라기보다는, 구조 속에서의 위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시도 자체에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브레송은 『돈』을 통해 관객에게도 윤리적 응답을 요구한다. 영화 속에서 단순히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을 정죄하기보다는,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고 구조적 폭력을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돈』은 도덕성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로 확장시키며, 우리 모두가 그 구조의 일부임을 깨닫게 한다.
3. 실천 윤리로서의 브레송 영화 읽기
브레송의 『돈』은 철학적이면서도 실천적인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단순히 ‘무엇이 옳은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옳음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것이다. 이는 영화가 단순한 관찰적 드라마가 아니라, 윤리에 대한 실천적 탐구의 장이 되게 만든다. 브레송은 이 영화를 통해 관객이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고, 오히려 각 인물의 처지를 ‘구조 안에서’ 사유하도록 유도한다. 이 점에서 『돈』은 구조주의 윤리의 실천 가능성을 보여주는 독특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이본이 저지른 살인을 단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죄와 구원의 가능성, 혹은 구원의 부재에 대해 관객 스스로 판단하도록 열려 있다. 이는 도덕이란 단순히 행위의 결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의식의 차원에 있다는 브레송의 윤리관을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교회 속 고해성사를 암시하는 장면은 이본의 윤리적 응답의 마지막 가능성을 암시하면서도, 그 자체가 구조 속에 갇혀 있음을 드러낸다. 결국 브레송의 카메라는 인물을 정죄하지 않고, 구조 안에서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러한 방식은 관객에게도 윤리적 책임을 묻는다. ‘나는 이 구조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나는 구조적 폭력에 얼마나 무관심한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돈』은 단지 영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윤리 감각에 깊은 반성을 요구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브레송의 윤리적 영화는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천으로서, 또한 성찰의 공간으로서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돈』은 윤리 철학과 영화 미학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이자 제안이다.
결론
로버트 브레송의 『돈』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윤리와 구조, 인간 존재의 문제를 고찰한 수작이다. 이 작품은 단지 위조지폐 사건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숨겨진 사회 구조와 인간의 도덕적 딜레마를 치열하게 탐구한다. 브레송은 인물들의 감정을 절제된 미학으로 표현하며, 우리가 그들의 내면에 쉽게 감정이입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는 관객이 윤리적 판단을 유보하고, 구조적 맥락에서 사건을 사유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이다. 영화는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기보다는 구조의 영향을 받는 행위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우리의 일상 속 도덕 판단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준다.
『돈』은 구조주의 윤리의 실천 가능성을 모색하는 철학적 영화다. 이 작품을 통해 브레송은 인간이 윤리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구조를 인식하고, 그 구조를 넘어설 수 있는 성찰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결국 『돈』은 관객에게 단지 ‘나쁜 사람’을 찾기보다, 우리 모두가 어떤 구조 속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를 묻는 성찰적 질문을 던진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윤리적 메시지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