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향기』와 키아로스타미의 죽음 미학

체리 향기


『체리 향기』는 이란 감독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대표작으로,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삶과 죽음 사이의 고요한 경계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색합니다. 키아로스타미 특유의 절제된 미장센과 리얼리즘 기법은 죽음을 삶의 일부로 사유하게 합니다.


1. 죽음을 말하지 않는 영화, 그러나 죽음을 이야기하다

『체리 향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죽음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주인공 바디 씨는 자신의 무덤을 대신 파주고, 죽은 것을 확인해줄 사람을 찾아 나서지만, 그는 한 번도 왜 죽고 싶은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키아로스타미는 이렇듯 삶과 죽음을 철학적 담론으로 끌어들이기보다는, 죽음을 하나의 '상태'로 보여주는 데 집중합니다. 관객은 대사보다는 정적인 화면과 인물의 눈빛, 그리고 그가 지나치는 이란의 황량한 풍경 속에서 죽음을 상상하게 됩니다. 이란 영화 특유의 미니멀리즘은 여기서 더욱 힘을 발휘합니다. 구체적인 설명 없이 비워진 공간과 침묵은 오히려 관객의 내면을 흔들며 죽음에 대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키아로스타미는 죽음을 슬픔이나 공포로만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삶의 또 다른 한 단면으로, 때로는 평온하고 담담하게 수용해야 할 현실로 제시합니다. 죽음을 선택하는 자와 그것을 말리는 자,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자까지. 『체리 향기』는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입장과 감정을 하나의 긴 대화 속에 담아냅니다. 이 영화에서 대화는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다양한 감정의 표현'이 됩니다. 이러한 접근은 서사 중심의 헐리우드식 죽음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방식이며, 키아로스타미가 세계적인 거장으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 카메라는 침묵한다, 관객은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거의 움직이지 않습니다. 정적인 쇼트와 반복되는 구도, 천천히 흘러가는 리듬은 관객에게 생각할 시간을 제공합니다. 키아로스타미는 서사의 전개를 최소화하면서 대신 이미지와 정적을 강조합니다. 영화는 바디 씨가 차를 타고 만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로만 구성되어 있고, 극적인 사건이나 반전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관객은 ‘왜 그는 죽고자 하는가?’ ‘죽음을 말리는 사람들은 왜 각자의 방식으로 설득하는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노인의 이야기는 인상적입니다. 그는 자신도 한때 죽음을 택하려 했지만, 체리 나무에서 떨어진 체리를 맛보며 다시 삶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죽음’이 단순한 종결이 아닌,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키아로스타미는 여기서 명확한 교훈을 주기보다는 여지를 남깁니다. 그의 카메라는 관찰자의 역할에 머무르며 판단하지 않고, 침묵을 통해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게 합니다. 이 영화의 진짜 힘은 바로 그 여백에서 나옵니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영화, 그것이 『체리 향기』의 미학입니다.


3. 자연, 비움, 그리고 리얼리즘의 미장센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인간 존재를 바라봅니다. 『체리 향기』에서도 그는 도시가 아닌, 황량한 언덕과 자연 속을 배경으로 죽음을 사유합니다. 인공적인 세트나 음악 없이, 자연의 소리와 빛, 그리고 토양의 질감을 그대로 담아냅니다. 키아로스타미는 이 영화에서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며, 죽음 또한 자연스러운 순환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특히 바디 씨가 차를 몰고 언덕을 오르는 장면에서는 인간의 존재가 자연 속에서 얼마나 작은지를 느끼게 하며, 죽음이라는 주제가 비극적으로만 느껴지지 않게 만듭니다. 또한 그는 배우에게 연기를 지시하지 않고, 실제 인물을 기용하거나 최소한의 연기 지침만을 줍니다. 이는 관객이 장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며, 리얼리즘을 강화합니다. 관객은 영화적 장치를 인식하기보다, 실제 삶 속 대화를 엿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러한 리얼리즘은 죽음을 특별하게 만들기보다는, 일상에 숨어 있는 감정으로 접근하게 합니다. 키아로스타미의 이러한 스타일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수많은 감독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사유적 시선은 현대 영화 속에서 여전히 유효합니다. 『체리 향기』는 죽음을 무겁게 끌어들이지 않으면서도, 그 무게감을 온전히 전달하는 데 성공한 드문 작품입니다.


결론: 죽음을 사유하게 만드는 영화, 키아로스타미의 조용한 목소리

『체리 향기』는 단순히 자살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영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소 회피해왔던 죽음이라는 주제를 조용히, 그러나 깊이 있게 바라보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키아로스타미는 이 영화에서 관객에게 어떤 정답이나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침묵하고, 여백을 남기며, 자연과 함께 죽음을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합니다. 『체리 향기』는 죽음을 다루지만 슬프지 않으며, 철학적이지만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시처럼, 감정을 조용히 환기시키고 생각을 자극하는 힘을 가집니다. 키아로스타미의 미학은 바로 이런 점에서 위대합니다. 그는 '죽음'을 소재로 하면서도, 삶의 아름다움을 더 강하게 떠올리게 만들며, 관객에게 묻습니다. "정말 죽고 싶은가요, 아니면 살아 있는 체리의 향기를 다시 느끼고 싶은 건가요?" 이 물음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유효하며,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그가 남긴 침묵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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