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향기』를 통해 본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생명과 죽음 철학

체리 향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체리 향기』는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 질문을 다룬 걸작이다. 영화는 주인공 바디 씨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여정을 따라가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의 의미를 사색하게 만든다. 키아로스타미는 단순한 플롯과 절제된 미장센을 통해 죽음을 무겁게 묘사하는 대신 삶의 소소한 아름다움과 연결된 죽음의 자연스러움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체리 향기』를 통해 키아로스타미가 어떻게 생명과 죽음을 철학적으로 풀어냈는지를 살펴본다.


1. 『체리 향기』의 미니멀리즘과 존재의 성찰

『체리 향기』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바디 씨가 자신의 무덤을 파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죽음을 확인해 달라고 부탁하는 이야기 외에는 별다른 사건이 없다. 그러나 이 단순함은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핵심 미학을 드러낸다. 그는 과잉된 설명이나 감정적 과장을 배제하고, 오히려 침묵과 여백을 통해 존재를 응시하게 한다. 관객은 바디 씨의 행동을 통해 그의 심리적 동요를 추측할 뿐이다. 명확한 동기조차 제시하지 않는 키아로스타미의 방식은 관객 스스로 죽음과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영화가 거부하는 친절함은 오히려 깊은 사유를 유도한다. 특히 반복되는 황토색 언덕을 오르내리는 자동차의 모습은 인간 존재의 무상함과도 닮아 있다. 마치 무한히 이어지는 생의 여정을 암시하듯, 바디 씨의 차는 목적 없이 흘러간다. 키아로스타미는 이 같은 미니멀리즘을 통해 거대한 담론을 펼치지 않고도 삶과 죽음의 무게를 절묘하게 전달한다. 그의 미학은 결국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존중과 성찰로 귀결된다. 『체리 향기』는 대사보다는 정적 속에서 울려 퍼지는 영화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이렇듯 키아로스타미는 가장 단순한 이야기로 가장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오랫동안 머릿속에 맴돈다.


2.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만나는 키아로스타미의 시선

『체리 향기』의 바디 씨는 왜 죽으려 하는가? 영화는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키아로스타미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죽음을 바라보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반응을 보여준다. 병사 지망생, 신학교 학생, 노인 등 바디 씨가 만나는 이들은 각기 다른 태도로 죽음에 대응한다. 병사 지망생은 당혹스러워하며 거절하고, 신학생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자살을 만류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등장하는 노인은 삶의 소박한 기쁨을 이야기하며 바디 씨를 설득하려 한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를 드러낸다. 삶이란 거창한 의미나 특별한 목적이 아니라, 단지 한 잔의 물, 한 줌의 체리, 그리고 아침 햇살 같은 소소한 것들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죽음을 '극복해야 할 공포'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은 삶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배경이며,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체리 향기』는 이러한 삶과 죽음의 연속성과 상호작용을 조용하지만 깊이 있게 풀어낸다. 바디 씨의 여정은 결국 스스로 삶을 재발견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키아로스타미는 삶을 미화하지도, 죽음을 저주하지도 않는다. 그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서도 인간 존재의 근본적 아름다움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 포착은 이질적이지 않고, 마치 아주 오래된 진실처럼 자연스럽게 관객에게 스며든다.


3. 『체리 향기』가 말하는 생명에 대한 소박한 긍정

영화의 말미, 바디 씨가 어둠 속에 누워 있을 때, 화면은 돌연 필름 촬영 현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브레히트적 소외 효과'는 관객을 이야기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지만, 동시에 영화가 말하려는 핵심을 다시금 환기시킨다. 죽음이란 절대적 끝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키아로스타미는 마지막 순간에도 죽음을 정지된 이미지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가 돌아가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세트장은 여전히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삶이 어떤 형태로든 계속된다는 은유처럼 느껴진다. 『체리 향기』가 관객에게 남기는 가장 큰 울림은 바로 이 지점이다. 삶이란 완성된 서사가 아니라, 크고 작은 순간들의 조각이며, 그 조각들 속에서 우리는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체리 나무 아래 묻히고자 했던 바디 씨의 소망은 단순히 죽음의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하나 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 열망이며,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몸짓이다. 키아로스타미는 그러한 인간적 소망을 비극으로만 보지 않고, 오히려 조용한 긍정으로 승화시킨다. 죽음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두려움이 아니라, 따뜻한 포용에 가깝다. 그렇게 『체리 향기』는 생명에 대한 소박하고도 깊은 찬사를 노래한다.


결론

『체리 향기』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인간 존재에 대해 가진 깊은 통찰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드러낸 작품이다. 영화는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결코 비극적 서사로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소소한 삶의 순간들을 통해 존재의 가치를 일깨운다. 키아로스타미는 생과 사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는다. 그는 삶과 죽음을 하나의 연속선상에 놓고, 그 위에 놓인 인간 존재의 연약함과 아름다움을 조명한다. 『체리 향기』는 관객에게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외면하는 대신,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인식하라고 말한다. 키아로스타미 특유의 미니멀리즘적 스타일은 그 메시지를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영화는 말이 아닌 침묵으로, 사건이 아닌 여백으로 관객을 이끈다. 그리고 그 여백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 다른 죽음의 얼굴을 떠올리고, 동시에 삶의 다양한 빛깔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체리 향기』는 단순히 예술적 성취를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따뜻하고 근본적인 사유를 촉발하는 작품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삶을 노래했다. 그리고 그 노래는 오랜 여운을 남기며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을 조용히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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