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재구성: 라클라우·무페 이론으로 읽는 『로마』의 사회적 풍경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는 1970년대 멕시코시티를 배경으로 한 가족 드라마이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사회적 긴장과 권력 구조의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본 글에서는 라클라우와 무페의 급진적 민주주의 이론을 통해 『로마』 속 가족 구조를 분석하고자 한다. 급진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가족은 고정된 단위가 아니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사회적 공간이다. 이를 통해 『로마』가 보여주는 가족의 해체와 재편 과정을 살펴본다.
1. 라클라우와 무페의 급진적 민주주의 이론: 권력, 정체성, 그리고 유동성
라클라우와 무페는 급진적 민주주의 이론을 통해 현대 사회의 권력 관계와 정체성 구성을 새롭게 해석하였다. 그들의 핵심 주장은 권력과 정체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협상되는 과정 속에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사회를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미완성된 장(field)'으로 보며, 권력 관계 역시 항상 균열과 재편을 경험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급진적 민주주의는 기존의 중심적 권력 구조를 해체하고, 다양한 이질적 주체들이 상호 투쟁하고 협력하는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를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은 가족이라는 단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가족은 안정성과 지속성을 상징했지만, 라클라우와 무페의 시각에서 가족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치적 공간이다. 가족 구성원 간의 권력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적·사회적 맥락에 따라 재구성된다. 급진적 민주주의는 모든 정체성과 권력 구조를 잠정적(hegemonic) 구성물로 본다. 이는 가족 안에서도 특정 역할이나 위치가 본질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어머니, 아버지, 자녀, 가사노동자 등의 정체성은 사회적·경제적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동하며, 어떤 형태의 가족도 완성된 공동체가 아니라 '항상 불완전한' 상태로 존재한다. 이러한 급진적 민주주의적 시각은 가족을 권력과 저항, 연대와 분열이 교차하는 역동적 공간으로 바라보게 한다. 결국 가족은 단순한 사적 영역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권력 구조를 압축적으로 반영하고 재현하는 장이 된다. 이러한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로마』를 분석하면, 작품이 단순히 한 가족의 해체를 그린 것이 아니라, 사회적 균열과 권력 변동의 복합적 과정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로마』에 나타난 가족 해체와 권력 관계의 변동
『로마』는 전통적 가족 구조가 서서히 무너지고, 새로운 형태의 관계가 생성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영화는 소피아와 그녀의 네 자녀, 그리고 가사노동자인 클레오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남편 안토니오의 부재는 전통적 부계 중심 가족 구조의 균열을 상징한다. 남편이 집을 떠난 이후, 소피아는 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 하고, 클레오는 가사노동자이자 아이들의 정서적 지지자로서 점점 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는 가족 내부의 권력 관계가 변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클레오는 혈연적 가족 구성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실질적 역할을 수행하며 새로운 가족의 일부로 편입된다. 그러나 이 과정은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권력의 재구성과정을 수반한다. 클레오가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듯 보이지만, 그녀의 지위는 여전히 사회적·경제적 약자에 머무른다. 이처럼 『로마』는 가족 내부의 유대와 차별이 동시에 존재하는 복잡한 현실을 묘사한다. 급진적 민주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가족 구조의 변화는 단순한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변동의 한 단면이다. 멕시코시티의 정치적 소요, 경제적 불평등, 젠더 권력 관계 등 거시적 요인들이 가족이라는 소규모 단위에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영화는 암시한다. 『로마』는 한편으로 가족 해체를 슬프게 그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형태의 연대와 돌봄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이는 라클라우와 무페가 말한 '이질적 주체들의 연대'라는 급진적 민주주의의 이상과 연결된다. 가족은 더 이상 고정된 틀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협상 가능한 관계망이 된다. 이처럼 『로마』는 가족이라는 장을 통해 사회적 권력 구조의 균열과 재편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3. 가족의 재구성과 급진적 민주주의: 『로마』의 사회적 함의
『로마』는 단순히 한 가족의 몰락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급진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권력 관계가 재편되고 다양한 주체들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가족이라는 가장 친밀한 단위조차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적 공간임을 보여준다. 클레오의 존재는 이러한 변화를 가장 잘 상징한다. 그녀는 전통적 가족 구조에서는 주변부에 위치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중심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이 이동은 단순한 승격이나 해방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착취와 차별의 구조 속에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관계와 연대 가능성을 체현한다. 급진적 민주주의가 강조하는 것은 완벽한 평등이나 갈등의 종식이 아니라, 끊임없는 협상과 재구성의 과정이다. 『로마』의 가족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보여준다. 전통적 가족 모델이 해체되면서도, 인물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서로를 돌보고 지탱한다. 이는 급진적 민주주의가 제안하는 사회 모델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갈등과 차이를 억압하는 대신, 그것을 인정하고 공존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로마』는 이러한 메시지를 섬세한 미장센과 서정적 서사를 통해 전달한다.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과 거리, 도시의 공공 공간이 서로 연결되며, 개인적 드라마와 사회적 드라마가 얽히는 방식은, 가족이 단순한 사적 단위가 아니라 정치적 공간임을 드러낸다. 결국 『로마』는 가족의 재구성을 통해 사회 전체의 재구성 가능성을 은유적으로 제시하는 작품이다.
결론
『로마』를 라클라우와 무페의 급진적 민주주의 이론으로 분석하는 작업은, 이 작품의 섬세하고 복합적인 사회적 메시지를 명확히 드러내준다. 영화는 전통적 가족 구조의 해체 과정을 단순한 개인적 비극으로 그리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사회적 권력 관계의 균열과 재구성의 과정으로 보여준다. 클레오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관계 맺음은 급진적 민주주의가 말하는 다양한 주체들의 연대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과정은 단순하고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 갈등과 차이, 권력의 불균형을 끊임없이 노출시키면서도 새로운 공존의 방식을 모색한다. 『로마』는 가족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을 통해, 사회 전체의 변동성과 유동성을 탐색하며, 민주주의적 상상력의 지평을 확장한다. 이 작품은 현대 사회에서 가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민주주의적 관계는 어떻게 가능할지를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